반 고흐가 너무 존경해서 그의 편지에 50여번 넘게 등장했던 작가가 있다. 인상파 화가 드가는 그 작가의 판화를 무려 750점이나 소유했다. 피카소는 그를 심지어 미켈란젤로에 견주었다. 고흐와 드가와 같은 동시대 작가들이 인정했던 그의 작품은 현재에도 수 많은 예술가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적인 작가 피터 도이그도 늘 이 아티스트의 작품을 곁에 둔다고 한다.
“선수가 알아보는” 그 작가의 이름은 오노르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
사실 누구?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세계미술사를 이끌었던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흠모했던 작품들을 그렸지만 정작 우리들에게는 잊혀진 그는 누구일까?
도미에는 180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어릴 적 부모와 함께 파리로 온다. 그가 작가로서 맞이한 세계는 1848년 2월 혁명, 제 2공화당, 나폴레옹 2세의 제2제정과 파리코뮌 등으로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격동의 프랑스 혁명시대였다. 그러한 소용돌이의 파리를 배회하며 그는 소외 받는 사람들을 그렸고, 그의 스케치는 판화, 석판화, 커리커쳐가 되어 파리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읽혔다. 40여년 동안 쉴새 없이 작업한 도미에는 4,000여점의 작품을 남겼지만 1872년 장님이 되어 작업을 중단하고 2년이 지난 그 후 세상을 떠날 때는 지독한 가난뱅이였다.
그가 선택한 가난이었지만 도미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긴 자유함이 있었다. 그가 진정 좋아하는 주제만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24세가 되던 해 루이 필립 왕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했던 도미에는 공화당을 지지했으며 신랄한 정치적인 커리커쳐를 뿜어 냈다. 그는 그 외에도 일상 속의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스튜디오로 들어와 기억으로 작업을 했다. 단 한번도 모델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스케치를 하고, 다시 지우고, 또 덧그린 작품들은 오묘한 생동감과 사실성을 간직한 채 세상의 단면을 꼬집는 통찰력을 간직하고 있다. 도미에가 남긴 소수의 유화 작품들은 미술대작들을 소장한 기관과 유수한 콜랙터들이었지만 그의 관객은 대중이었다.
도미에가 그린 사람들은 단순한 소재를 뛰어 넘어 흔히 친구들이었다. 드가가 그린 노동계급의 발레리나들과는 다른 접근법. 도미에의 그림에는 애정이 있다. 어쩌면 그의 유산은 현재 우리에게 더 짙은 호소력을 주지는 않을까?
그림 하나
젓을 먹이는 여자와 바구니를 웅켜쥐고 초점 잃은 눈의 여자에 기대어 잠이 든 꼬마아이. 그 뒤로 꽉 차서 공간을 가득 매운 사람들이 빽빽히 자리를 매꾼 3등석의 기차안. 도미에르가 1862년에 발표한 “3등석 기차안”이다.
그림 둘
회색 코트를 입고 명화 앞에서 작품을 보는 남자가 있다. 그의 차림새로 보아 명화들을 소유하는 부유층은 아니다. 구부정하게 숙이고 자신이 소유하고 싶지만, 이를 구매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르는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넘겨보고 있는 그는 “프린트 콜랙터”이다.
도미에가 그토록 사랑했던 파리의 19세기는 근대 그 자체를 상징했다. 작가들은 밖으로 나와 야외스케치를 했고 기차역을 그리기도 했다. 보들레어는 파리를 찬사하며 신화, 성경을 소재로 하는 역사화가 아닌 파리를 그리라고 주창했다. 그런 휘황찬란한 변화 속에 소외된 계층을 사랑했고 그들의 목소리를 소리 없이 화폭에 담았던 도미에. 그는 잊혀졌지만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작가이다.
김승민 큐레이터 글 (by Stephanie Seungmin Kim)